이전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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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전은 후한 말 조조를 섬긴 무장이다. 조조 휘하에서 군량 수송을 방해하는 적을 격파하고, 유비군을 막아내는 등 활약했다. 215년 손권의 합비 공격 당시 장료와 협력하여 손권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으며,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조비는 이전의 공을 기려 민후의 시호를 내렸다. 이전은 학문을 좋아하고 사대부를 존경하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삼국지연의》에서도 조조의 신중한 조언자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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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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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전 |
원어 이름 | 李典 |
자 | 만청 (曼成, Man cheng) |
출생 | 180년 이후 (추정) |
출생지 | 연주 산양군 거야현(현재의 산둥성 주예현) |
사망 | 215년 이후 또는 217년 이후 (추정) |
직업 | 장군 |
주군 | 조조 |
친척 | 이천 (삼촌) |
자녀 | 이진 최소 한 명 이상의 아들 |
관직 | |
주요 관직 | 비장군 (裨將軍) 복로장군 (捕虜將軍) 파로장군 (破虜將軍) |
봉작 | 도정후 (都亭侯) |
시호 | 민후 (愍侯) |
2. 생애
이전은 숙부 이건과 사촌 이정의 뒤를 이어 젊은 나이에 부대를 이끌게 되었다.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춘추좌씨전 등 여러 서적에 능통했으며, 조조는 이를 인정하여 리호군 태수 등 민정을 살피는 직책을 맡기기도 했다(『위서』).
건안 5년(200년) 관도 전투에서는 군량 보급을 담당했고, 이후 비장군에 임명되었다. 건안 7년(202년)에는 정욱과 함께 수로를 차단하려던 원상의 부하 고번을 격파했다. 유비와의 박망파 전투에서는 신중론을 펼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위기에 빠진 하후돈을 구원했다.
이후 업 포위전(204년), 고간 및 해적 관승 토벌(205년-206년) 등에 참여하며 파로장군 및 도정후에 봉해졌다. 그는 일족을 위군 업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조에게 충성심을 보였고[20], 건안 13년(208년) 형주 정벌과 건안 16년(211년) 관중 전투에도 참전했다.[21]
건안 20년(215년) 합비 전투에서는 장료, 악진과 함께 소수의 병력으로 손권의 대군을 막아냈다. 평소 장료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국가적 위기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접고 협력하여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 공으로 식읍이 가증되어 총 300호가 되었다.
이전은 학문을 좋아하고 겸손했으며, 다른 장수들과 공을 다투지 않고 사대부를 존경하여 군중에서 장자(長者)로 칭송받았다. 36세에 사망했으며, 아들 이정이 뒤를 이었다. 조비(문제) 즉위 후 합비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민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243년에는 조방(제왕)의 조칙에 따라 조조의 묘정에 배향되는 20명의 공신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제왕기』). 진수는 그가 유학자를 존중하고 의로움을 앞세운 점을 높이 평가했다.
2. 1. 초기 활동
이전은 산양군 거야현(鉅野縣, 현재 산둥성 거야현) 출신이다. 그의 숙부 이건(李乾)은 후한 말 혼란기에 칭스현(乘氏縣, 현재 허쩌시 동쪽)에서 수천 명의 사객을 이끌던 지역 유력자였다.[1]후한 헌제 초평 연간(190–193년), 이건과 이전은 무리를 이끌고 조조 휘하로 들어가 그를 도왔다. 이들은 수장현(壽張縣, 현재 둥핑현 남쪽)에서 황건적의 난 잔당을 격파했으며, 이후 조조를 따라 원술, 도겸 등 다른 군벌들과의 전투에 참여했다.[2]
194년, 조조와 여포 사이에 연주(兗州) 쟁탈전이 벌어지자 조조는 이건을 칭스현으로 보내 지역 기반을 다지게 했다. 그러나 이건은 여포의 부하 설란(薛蘭)과 이봉(李封)의 회유를 거절하다가 살해당했다. 조조는 이건의 아들인 이정(李整)에게 아버지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고, 부하들을 보내 설란과 이봉을 공격하도록 지원했다. 이정은 이들을 격파하고 연주의 여러 현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 공으로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임명되었다.[3]
이정이 사망한 후, 이전이 영천군영음현(潁陰縣, 현재 허창시)의 현령(縣令)과 중랑장(中郎將)에 임명되어 사촌인 이정의 군대를 물려받아 지휘하게 되었다. 이전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군사(軍事)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스승을 모시고 ''춘추''와 ''좌전'' 등 여러 고전을 깊이 익혔다.[4] 조조는 이러한 이전의 면모를 좋게 평가하면서도 그의 실무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조조는 이전을 리후군(離狐郡, 현재 둥밍현 동남쪽)의 태수(太守)로 임명하여 주로 백성을 다스리는 민정(民政) 업무를 맡겼다.[5]
2. 2. 원소와의 전투
200년 관도 전투에서 조조 군대와 원소 군대가 격돌했을 때, 이전은 그의 일족 및 부하들과 함께 조조 군대의 최전선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원소가 패배한 후, 조조는 이전의 공을 인정하여 비장군( 裨將軍zho )으로 임명하고 안민( 安民zho )에 주둔하게 했다.[6]202년 원소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원담과 원상이 후계 다툼을 벌이자, 조조는 이 틈을 타 원씨 세력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은 정욱과 함께 황하를 통해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원상은 부하 고번( 高蕃zho )을 보내 수로를 차단하려 했다. 조조는 수로가 막히면 육로로 수송하라고 지시했으나, 이전은 고번의 군대가 방심하고 있어 쉽게 격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현장에서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정욱을 설득했고, 함께 고번 군을 급습하여 격파하고 중요한 보급로를 확보하는 공을 세웠다.[7]
204년 업 전투에서 원상 군을 격파한 후, 조조는 이전과 악진에게 원상의 사촌이자 동맹인 고간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8] 205년에는 조조에게 항복했던 고간이 다시 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전은 다시 악진과 함께 호관( 壺關zho ; 현재 산시성 호관현)을 공격했으나, 이때는 점령에 성공하지 못했다.
2. 3. 유비와의 전투
202년, 형주의 유표는 조조가 북방 원정 중인 틈을 타 유비에게 북진하여 허(許)를 공격하도록 명했다.[9] 이에 조조는 하후돈과 이전을 보내 유비군을 막게 했다. 유비는 거짓으로 군수 물자를 불태우고 후퇴하는 척하는 계책을 사용했다. 하후돈이 이를 보고 유비를 추격하려 하자, 이전은 신중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적이 아무 이유 없이 물러나는 것을 보니 복병이 의심됩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좁고 초목이 무성하니 추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경고했다.[9]그러나 하후돈은 이전의 합리적인 경고를 무시하고 우금과 함께 유비를 추격했고, 이전은 후방에 남았다. 하후돈과 우금의 부대는 이전의 예상대로 유비의 복병에 걸려 큰 위기에 빠졌다. 이때 이전이 침착하게 남은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러 나타나자, 유비는 이전의 지원군을 보고 군사를 물렸다.[9] 이 전투는 흔히 박망파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전의 신중함과 전술적 안목이 드러났으며, 반대로 하후돈의 섣부른 판단이 부각되었다.
2. 4. 합비 전투
209년 강릉 전투 이후, 조조는 손권과의 국경 지대인 합비 방어를 위해 이전, 장료, 악진을 남겨두었다.[11] 합비는 조조와 손권 영토의 경계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전은 209년 12월부터 이들과 함께 합비를 지키게 되었는데, 평소 장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215년 8월, 손권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해왔다. 당시 합비에 주둔한 이전, 장료, 악진의 병력은 7천여 명에 불과했다.[21] 장료는 조조의 지시[22]에 따라 성 밖으로 나가 적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전과 악진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아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11] 장료는 이전과 악진에게 "우리 군주께서는 멀리 계시고, 구원병이 도착할 때쯤이면 우리는 이미 패배했을 것이다. 적들이 막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공격하여 기세를 꺾어야 한다. 승패는 이 전투에 달렸는데, 왜 망설이는가?"라고 설득했다.[12]
이에 이전은 감동하며 "此國家大事|차국가대사중국어. 顧君計何如耳|고군계하여이중국어, 吾豈 λόγω 私憾 而 忘 公義 邪|오기인사감이망공의야중국어!"[25][13] (이는 나라의 위기이다. 당신의 계책이 어떠한지를 볼 것이지, 어찌 나 개인의 원한 때문에 공적인 도리를 잊겠는가!)라고 말하며 장료의 의견에 적극 동조했다. 평소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대의를 따른 것이다. 결국 이전, 장료, 악진은 힘을 합쳐 손권의 대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물리쳤다.[13] 이 공으로 이전은 식읍 100호를 추가로 받아 총 300호가 되었다.[13]
2. 5. 죽음과 평가
이전은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나[14], 《삼국지》 이전전에는 그의 정확한 사망 시기나 원인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의 작위는 아들 이진(李禎중국어)이 상속받았다.황초 6년(225년), 조비(曹丕)는 이전이 215년 합비 전투에서 세운 공적을 기려 '민후'(愍侯중국어)라는 시호를 내렸다.[15] 이진은 아버지의 후작위를 계승하고 식읍 100호를 추가로 받았으며, 이전의 또 다른 아들 한 명 역시 관내후 작위와 식읍 100호를 하사받았다.[16]
진수는 《삼국지》 이전전에서 이전이 학문을 좋아하고 겸손했으며, 문인들을 존경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공을 다투지 않았고 사적인 감정보다 공무를 우선시했으며,[17] 이러한 고귀하고 점잖은 태도와 '공무 우선'의 자세는 칭찬받을 만하다고 기술했다.[18] 또한, 군중에서는 그의 신중하고 성실함을 들어 장자(長者)로 칭송했다. 진수는 특히 이전이 유학자를 존중하고 의로움으로써 개인적인 불화(장료와의 관계 등)를 잊은 점을 높이 평가했다.
243년 가을 7월, 조방(曹芳)은 조칙을 내려 조조(曹操)의 묘정에 배향될 공신 20인을 선정했는데, 이전도 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이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동탁 토벌을 위한 의병을 모집할 때 처음 등장하여 조조에게 가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여포, 황건적, 원소, 유비, 손권 등과의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활약한다. 특히 황건적의 황소를 사로잡는 등 무장으로서 일찍부터 공을 세운다. 소설 속 예형은 이전이 학문을 좋아하는 점을 들어 '글이나 전달할 사람'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매우 신중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성급하게 행동하려는 상관을 말리는 역할을 자주 맡는다. 복양에서 여포를 공격할 때, 위험하다며 성 밖에 머물 것을 조조에게 조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조조는 진궁의 계략에 빠져 큰 화를 입는다. 또한 조인과 함께 신야현의 유비를 공격할 때에도 승산이 낮다고 판단하여, 번성을 지키며 원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공을 서두른 조인은 이를 무시했다가 서서의 계략에 휘말려 번성을 빼앗기고 만다. 박망파 전투에서는 제갈량의 계략을 의심하며 하후돈에게 화공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하후돈은 이를 듣지 않고 추격하다가 화공에 당해 대패한다. 장판 전투에서는 장비가 다리를 불태운 것을 보고 제갈량의 함정일 수 있다고 조조에게 진언했으나, 조조는 장비에게는 계책이 없을 것이라며 무시하고 추격하다가 관우의 복병에 당해 퇴각한다. 이처럼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조언하는 신중한 부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209년 합비 전투에서는 장료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오나라의 송겸을 죽이고, 장료, 악진과 협력하여 태사자에게 큰 부상을 입히는 활약을 보인다. 215년 합비 전투에서는 장료와의 평소 관계 때문에 처음에는 출전을 망설였으나, 장료의 질책을 듣고 결심하여 기습에 참여한다. 소사교를 파괴하고 장료, 악진과 함께 손권 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한다. 216년 유수구 전투에서는 서성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4. 친족 관계
5. 묘소
『가경합비현지』[23]에 따르면, 이전이 합비에 주둔했을 때 선조인 이릉을 모시기 위해 합비시 비서현의 자봉산에 이릉묘(현재의 서려사)를 세웠으며, 이전 또한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에 따라 현재 자봉산에는 이전의 묘가 있다.
또한, 산둥성 허쩌시 거야현에서도 이전의 묘로 추정되는 석실이 발견되어 허쩌시 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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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Yizhoushu
[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Sanguozhi
[19]
서적
資治通鑑
[20]
문서
[21]
서적
水経注
[22]
서적
張遼伝
[23]
문서
[24]
서적
자치통감
[25]
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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